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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하찮은 가치 - 김용택 -
이 하찮은 가치
11월이다.
텅 빈 들 끝,
산 아래 작은 마을이 있다.
어둠이 온다.
몇개의 마을을 지나는 동안
지나온 마을보다
다음에 만난 마을이 더 어둡다.
그리고 불빛이 살아나면
눈물이 고이는 산을 본다.
어머니가 있을 테니까, 아버지도 있고,
소들이 외양간에서
마른풀로 만든 소죽을 먹고,
등 시린 잉걸불 속에서 휘파람 소리를 내며
고구마가 익는다.
비가 오려나보다.
차는 빨리도 달린다. 비와
낯선 마을들,
백양나무 흰 몸이
흔들리면서 불 꺼진 차창에 조용히 묻히는
이 저녁
지금 이렇게 아내가 밥 짓는 마을로 돌아가는 길, 나는
아무런 까닭 없이
남은 생과 하물며
지나온 삶과 그 어떤 것들에 대한
두려움도 비밀도 없어졌다.
나는 비로서 내 형제와 이웃들과 산비탈을 내려와
마을로 어둑어둑 걸어들어가는 전봇대들과
덧붙일 것 없는 그 모든 것들에게
이렇게 외롭지 않다.
혼자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금의 이 하찮은, 이유가 있을 리 없는
이 무한한 가치로
그리고 모자라지 않으니 남을 리 없는
그 많은 시간들을 새롭게 만들어준, 그리하여
모든 시간들이 훌쩍 지나가버린 나의 사랑이 이렇게
외롭지 않게 되었다.
* 향수 이동원 박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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