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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山門)에 기대어
[송수권]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하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니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날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날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옴을
* 송수권 (1940년 ~) 시인
하마터면 이 시는 세상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유성처럼 사라질 뻔했다. 송수권 시인이 서대문 화성여관 숙소에서
이 작품을 백지에 써서 응모를 했는데, 잡지사 기자가 "원고지를 쓸 줄도 모르는 사람의 원고"라며 휴지통에 버렸다.
당시 편집 주간이었던 이어령씨가 휴지통에 있던 것을 발견해 1975년 '문학사상' 지면에 시인의 데뷔작으로 발표했다.
이 일화로 '휴지통에서 나온 작품'이라는 '입소문'을 타 문단에서 화제가 되었고, 발표 이후에는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누이를 애타게 호명하고 있지만, 이 시는 남동생의 죽음에 바치는 비가 (悲歌)였다.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비어 있는 맞은편을 망연히 바라보았을 그 시방(十方)의 비통함은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다. 시인은 무엇보다 죽은 동생의 환생에 대한 강한 희원을 드러낸다.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등의 역동적인 문장은 적극적인 환생을
바라는 시인의 마음을 엿보게 한다.
산문(山門)은 속계(俗界)와 승계(僧界)의 경계이고 , 이승과 명부 (冥府)가 갈라지는 경계인 바, 산문에 기대어 생사의 유전(流轉)을 목도하는 것은 큰 고통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생사의 감옥에 갇혀 살아도 죽은 사람은 산 사람의 마음속에서 영생을 살아 이처럼 마음이 절절하게 울리는 노래를 낳았다.
송수권 시인은 전통 서정시의 맥을 이어오면서 황토와 대(竹)와 뻘의 정신에 천착해 왔다.
그는 '곡즉전(曲即全.구부러짐으로써 온전할 수 있다)'을 으뜸으로 받든다.
"곡선 속에 슬픔이 있고 , 추억이 있고, 들숨이 있지요. 시간이 있고 희망이 있고, 공간이 있습니다" 라고 그는 말한다.
그의 시는 "고깔 쓴 여승이 서서 염불 외는것" 같아서 사람의 마음을 '애지고 막막'하게 하지만 남도 특유의 가락과
토속어의 사용으로 슬픔과 한을 훌쩍 넘어서는 진경을 보여준다. - 문태준 .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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