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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윤동주]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놓고 나뭇가지 위에 하늘이 펼쳐 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씻어 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 -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 -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은 어린다.
' 사랑처럼 슬픈' 소년의 초상화
* 윤동주 (1917년 ~1945년) 시인 . 독립운동가
젊어서 죽은 자는 결코 늙지 않는다. 남아있는 자들에게 그들은 언제나 청춘이다.
1945년 2월에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수감되어 있던 일본 후쿠오카 교도소에서 외롭게 죽어간 윤동주의 나이는
겨우 27세였다. 체포된 지 19개월 2일 째였으며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서시>) 고 노래한 지 3년 3개월 남짓 뒤였다.
1917년 북간도에서 태어나 서울연희전문과 일본 교토의 릿교대학, 도지샤대학 등에서 공부를 한 그는 죽는 날까지도
'학생'의 신분이었다. 사회인은 그의 역할이 아니었다.
그는 다만 "궂은비 내리는 가을 밤/ 벌거숭이 그대로/잠자리에서 뛰쳐나와/ 마루에 쭈구리고 서서/ 아인 양하고/ 솨-
오줌을 싸요." (<가을밤>) 하고 노래한 '개구쟁이' 였으며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십자가>)
라고 결의를 다진 '의혈청년' 사이에 '소년' 이있다.
소년은 단풍잎이 뚝뚝 떨어지는 가을날, 맑고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아름다운 순이 '의 얼굴을 떠올린다.
이 소년 화자는 우리 시가 마련하고 있는 가장 '깨끗하고 순결한' 영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죽하면 그의 손바닥으로 맑은 강물이 흐르고 또 흐르겠는가.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씻어 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 " 날 정도로 그의 영혼은 청신하고 해맑다.
그러나 이 '맑음; 만으로는 이 시의 '황홀한 슬픔' 을 다 설명할 수 없다.
여기에 "순이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내려, 슬픈 것처럼 창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 위에 덮인다"
라고 노래한 ,<눈오는 지도 > 를 겹쳐놓으면 사정은 또 달라진다.
이 시에 따르면 조만간 순이는 떠나고 소년은 상처 입게 될 것이다. 이 상실의 미래가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황홀히 눈을 감는" 소년의 모습에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제공한다.
그것은 훼손되기 일보 직전의 아슬아슬한 미라고 할 만하다. 불안한 아름다움, 그것이 소년이다.
이 '사랑처럼 슬픈' 소년의 초상화는 윤동주가 그려 보인 우리 시의 새로운 경지다.
그는 이 보물과 더불어 스스로 모가지를 드리운 채 영원히 십자가에 못 박힌 소년이 되었다.
이제 참회는 어쩌면 우리 몫인지도 모른다.
- 신수정 .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