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 [강소천] 물 한 모금 입에 물고 하늘 한번 쳐다보고 또 한 모금 입에 물고 구름 한번 쳐다보고 단 네 줄에 압축된 닭의 '모든것' * 강소천 (1915년 ~ 1963년) 아동문학가 이보다 더 간결할 수 있을까. 단 네 줄로 닭의 모든 것이 표현되고 있다. 닭은 물 한 모금 마시고 고개 한 번 들고, 또 물 한 모금 마시고 고개 한 번 든다. 닭이 물을 마시는 이 무심한 행동을 강소천은 무심히 보지 않고 '순간 포착' 했다. 그리고 거기에 슬쩍 '하늘'과 '구름'을 집어넣었다. 닭이 물 한 모금 마시고 고개 한 번 드는 것은 하늘과 구름을 보기 위해서라는 것, 이 순간, 시가 탄생했다. 바로 이 시다. 아마도 강소천에게는 대상의 순간 포착력과 시적 압축에 대한 신념이 있었던 듯하다. "달밤/ 보름달 ..
먼지야 , 자니 ? [이상교] 책상 앞에 뽀얀 먼지 "먼지야, 자니? " 손가락으로 등을 콕 찔러도 잔다. 찌른 자국이 났는데도 잘도 잔다. 작고 볼품없는 것들에 대한 사랑 * 이상교 ( 1949년 ~ ) 작가 먼지는 그 부피나 의미의 크기에서 가장 작은 단위의 물질이다. 한 시학자에 따르면 먼지는 찢어짐과 모순에서 태어나고 그 본질은 극한소의 분할이다. 먼지의 정체성이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물질의 최소단위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듯하다. 이를테면 김수영이 "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 할 때, 먼지는 더 작게 쪼갤 수 없는 가장 작은 자아, 작아서 볼품도 없고 의미화할 수도 없는 한심한 것의 상징이다. 먼지는 고갈, 오류, 소멸의 연상에서 그 존재태(存在..
봄편지 [서덕출] 연못가에 새로 핀 버들잎을 따서요 우표 한 장 붙여서 강남으로 보내면 작년에 간 제비가 푸른 편지 보고요 조선 봄이 그리워 다시 찾아옵니다. 버들잎 우표 삼아 제비에게 쓴 편지 * 서덕출 ( 1906년 ~1940년) 시인. 아동문학가 툴루즈 로트레크, 구본웅, 서덕출, 이 세 예술가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물랭루즈의 연인'으로 유명한 로트레크, 시인 이상의 초상화를 그린 구본웅, 그리고 의 서덕출 등은 평생 척추 장애로 고통 받았다. 장애는 그들의 천형이자 예술적 밑바탕이었다. 우리들은 그들을 감히 '우리들의 사랑스러운 곱추 예술가들' 이라고 부른다. 1906년 1월 울산에서 태어난 서덕출은 다섯 살 되던 1922년 자신의 집 대청마루에서 미끄러져 다리를 다친다. 이 다리의 염증이 척..
밤이슬 [이준관] 풀잎 위에 작은 달이 하나 떴습니다. 앵두알처럼 작고 귀여운 달이 하나 떴습니다. 풀벌레들이 어두워할까 봐 풀잎 위에 빨간 달이 하나 몰래 떴습니다. 풀벌레들의 등대가 된 밤이슬 * 이준관 ( 1949년 ~) 시인 시인은 딱히 이름붙일 수 없는 하나의 공간을 그린다. 이 공간은 개별적으로 호명할 수 없는 것들의 장소, 그 익명의 현존을 떠받치는 기반이다. 심연이 아니라 세계의 표면, 즉 밤이슬과 풀잎과 풀벌레들로 이루어진 세계다. 밤은 죽음의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해명되지 않은 여러 위함을 내포한다. 그 세계에서 풀벌레들은 떨며 운다. 풀잎 위에 앉은 이슬은 달빛을 받고 반짝하고 빛을 낸다. 아무리 작다 할지라도 빛의 존재는 어둠이 불러들인 불안과 공포의 그림자를 지운다. 밤이슬이 앵두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