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달 [윤극영]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은하수를 건너서 구름 나라로 구름 나라 지나서 어디로 가나 멀리서 반짝반짝 비치이는 건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슬픔 딛고 노 저어라, 저 불빛을 향해 * 윤극영( 1903년 ~1988년) 작곡가 . 아동문학가 거의 국민가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이 시는 1연과 2연 사이에 묘한 분열이 있다. 처음 연을 지배하는 정서는 '서쪽 나라' 라는 메타포에서 보듯 죽음과 무관하지 않다. 동쪽이 삶과 관련되어 있다면 서쪽은 언제나 삶 이후의 세계를 가리킨다. 지금 화자는 새벽하늘에 걸린 반달을 보며 그 '하얀 쪽배' 가 서쪽 나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돛대도 아니 달고..
문구멍 [신현득] 빠꼼 빠꼼 문구멍이 높아간다. 아가 키가 큰다. 아기의 호기심에 문은 어느새 빠꼼 빠꼼 * 신현득 (1933년 ~2008년) 아동문학가 은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가작으로 입선한 동시다. 빠꼼 빠꼼 문구멍이 나 있다. 누가 문구멍을 뚫었나 했더니 저 호기심이 왕성한 아가가 그 주인공이다. 문명을 밀어올린 힘의 바탕인 저 호기심을 누가 말릴 수 있을 것인가. 저 어린 호기심이 자라서 우주시대를 연 소련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를 만들고, 처음으로 화성 옆을 스치며 화성영상을 보내온 미국의 행성 탐사선 매리너호를 만들었다. 하룻밤만 자고 일어나도 아가는 키가 자란다. 운동 역학에 무지한 달팽이가 기어가는 것, 활강법을 배운 적 없는 새가 창공을 나는 것, 산파술 (産婆術)을 배운 바 ..
소년 [윤동주]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놓고 나뭇가지 위에 하늘이 펼쳐 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씻어 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 -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 -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은 어린다. ' 사랑처럼 슬픈' 소년의 초상화 * 윤동주 (1917년 ~1945년) 시인 . 독립운동가 젊어서 죽은 자는 결코 늙지 않는다. 남아있는 자들에게 그들은 언제나 청춘이다. 1945년 2월..
개구리 [한하운] 가갸 거겨 교교 구규 그기 가. 라랴 러려 로료 루류 르리 라. 소록도 가는 길 . . . 개구리 讀經 소리 가득하구나 * 한하운 ( 1919년 ~1975년) 시인 한하운은 함경남도 함주 태생으로 본명은 태영(泰永) 이다. 한때 경기도청의 공무원이었는데, 한센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가 요양하다가 1948년에 남쪽으로 내려 왔다. 1949년에 첫 시집 (1949. 정음사)를 냈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 가도가도 붉은 황톳길. . ./ (. . . )/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가도 천리 먼 전라도길." () '문둥병"이라는 천형의 병고를 지고 걷는 인생길은 팍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