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꽃 [권태응] 자주꽃 핀 건 자주 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자연에 순응하는 생명의 경이로움 * 권태응 ( 1918년 ~1951년) 시인 은 단순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진국이 우러나오는 수작이다. " 자주꽃 핀 건 자주 감자" ,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다. 단순하고 명쾌하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드러냄이 라는 진리와 더불어 종 (種)의 명령에 순응하는 개체의 숭고함을 보여준다. 자주꽃 핀 데 하얀 감자가 달리지 않고, 하얀 꽃 핀 데 자주색 감자가 달리지 않는다. 무릇 생명 가진 것들은 그 종의 진실을 거스르지 않는다. 우리는 말마다 이 기적과 신비를 체험하며 이 우주 안에서 거대한 생명의 코러스에 참여하는 것이다. 본디 감자..
콩, 너는 죽었다 [김용택] 콩타작을 하였다 콩들이 마당으로 콩콩 뛰어나와 또르르또르르 굴러간다 콩 잡아라 콩 잡아라 콩 잡으러 가는데 어, 어, 저 콩 좀 봐라 구멍으로 쏙 들어가네 콩, 너는 죽었다 어린 아이 마음을 닮은 '섬진강 시인' * 김용택 ( 1948년 ~) 시인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은 알고 보면 동시집 의 저자이기도 하다. 전북 임실의 덕치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던 그에게 동시집은 썩 잘 어울리는 짝 같다. 사실, 그의 시는 이미 동시의 세계와 별로 구분되지 않는 어떤 영역 속으로 들어간 지 오래다. 소설가 이병천의 지적처럼 추사 선생이 완성의 경지에 이르러 동자체 (童子體) 글씨를 선보이게 된 과정과 비슷하다고 할까 동서고금의 숱한 대가들이 걸어갔던 그 경지를 우리는 탈속이라 부..
나뭇잎 배 [박홍근] 낮에 놀다 두고 온 나뭇잎 배는 엄마 곁에 누워도 생각이 나요. 푸른 달과 흰 구름 둥실 떠가는 연못에서 사알 살 떠다니겠지. 연못에다 띄워 논 나뭇잎 배는 엄마 곁에 누워도 생각이 나요. 살랑살랑 바람에 소곤거리는 갈잎 새를 혼자서 떠다니겠지. 엄마 품 같은 연못에서 나뭇잎 배를 탄 아이 * 박홍근 (1919년 ~2006년) 아동문학가 한 때 해군군악대에서 근무하던 박홍근은 순연한 마음으로 를 썼다. 는 아직은 권태나 수면장애를 모르는 아이의 마음에 깃든 고요와 평화를 노래한다. 하늘과 땅, 해와 달, 잠과 깸은 어느 한쪽에 치우침 없이 균형을 잡는다. 그 균형 위에서 고요와 평화는 모란꽃처럼 피어난다. 청산은 녹음이 짙고, 그 녹음이 얼비친 연못의 물은 맑다. 놀이에 푹 빠진 아..
풀잎 2 [박성룡]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 우리가 '풀잎' 하고 그를 부를 때는, 우리들의 입 속에서 푸른 휘파람 소리가 나거든요. 바람이 부는 날의 풀잎들은 왜 저리 몸을 흔들까요. 소나기가 오는 날의 풀잎들은 왜 저리 또 몸을 통통거릴까요.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른을 가졌어요. 우리가 '풀잎' '풀잎' 하고 자꾸 부르면 우리의 몸과 맘도 어느덧 푸른 풀잎이 돼버리거든요. 한국인의 애송 동시 [2] * 박성룡 (1932년~2002년) 시인 풀이 있고 풀잎이 있다. 서로 크게 다르지 않은 말들이다. 풀이라고 해도 좋고 풀잎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그러나 어떤 시인에게 풀잎은 꼭 풀이라고 불려야 하고 또 어떤 시인에게 풀은 꼭 풀잎이어야만 한다. 김수영이 전자에 속한다면, 박성룡은 후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