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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음이 타는 가을강 (江)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 (江)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다음 사랑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 가는, 소리죽은 가을강 (江)을 처음 보것네. * 박재삼 (1933.~1997.) 시인 박재삼은 생전에 '슬픔의 연금술사'로 불린 시인이다. 시 '눈물 속의 눈물'에서 "꽃잎 속에 새 꽃잎/겹쳐 피듯이//눈물 속에 새로 또/눈물 나던 것이네"라고 노래했듯이 그의 시들은 눈시울이 촉초근하게 젖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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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깨를 털면서 [김준태] 산그늘 내린 밭 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 보아하니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나는 한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한다. 세상사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이 참깨를 털어내는 일엔 희한하게 있는 것 같다. 한번을 내리쳐도 셀 수 없이 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갱이들 도시에서 십 년을 가차이 살아본 나로선 기가막히게 신나는 일인지라 휘파람을 불어가며 몇 다발이고 연이어 털어낸다. 사람도 아무 곳에나 한 번만 기분좋게 내리치면 참깨처럼 솨아사아 쏟아지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털다가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 되느니라" 할머니의 가엾어하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 * 김준태 ( 1948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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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수수밭 [천양희] 마음이 또 수수밭을 지난다. 머위잎 몇장 더 얹어 뒤란으로 간다. 저녁만큼 저문 것이 여기 또 있다 개밥바라기별이 내 눈보다 먼저 땅을 들여다본다 세상을 내려놓고는 길 한쪽도 볼 수 없다 논둑길 너머 길 끝에는 보리밭이 있고 보릿고개를 넘은 세월이 있다 바람은 자꾸 등짝을 때리고, 절골의 그림자는 암처럼 깊다. 나는 몇 번 머리를 흔들고 산 속의 산, 산 위의 산을 본다. 산은 올려다보아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저기 저 하늘의 자리는 싱싱하게 푸르다. 푸른 것들이 어깨를 툭 친다. 올라가라고 그래야 한다고. 나를 부추기는 솔바람 속에서 내 막막함도 올라간다. 번쩍 제정신이 든다. 정신이 들 때마다 우짖는 내 속의 목탁 새들 나를 깨운다.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들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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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익은 사과 [김혜순]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 * 김혜순 (1955 ~ )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