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서 (書) [유치환]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救)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 (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永劫)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神)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對面)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의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 (沙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 유치환 (1908년 -1967년) 시인. 교육인 유치환 시인의 작품 가운데 애송시 후보를 꼽으라면 "사랑..
갈대 등본 [신용목] 무너진 그늘이 건너가는 염부 너머 바람이 부리는 노복들이 있다 언젠가는 소금이 설산(雪山)처럼 일어서던 들 누추를 입고 저무는 갈대가 있다 어느 가을 빈 둑을 걷다 나는 그들이 통증처럼 뱉어내는 새떼를 보았다 먼 허공에 부러진 촉 끝처럼 박혀 있었다 휘어진 몸에다 화살을 걸고 싶은 날은 갔다 모든 모의(謀議)가 한 잎 석양빛을 거느렸으니 바람에도 지층이 있다면 그들의 화석에는 저녁만이 남을 것이다 내 각오는 세월의 추를 끄는 흔들림이 아니었다 초승의 낮달이 그리는 흉터처럼 바람의 목청으로 울다 허리 꺾인 가장(家長) 아버지의 뼈 속에는 바람이 있다 나는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 신용목 (1974년 ~ ) 시인 시인 신용목은 "바람 교도 (敎徒)"(시인 박형준의 말)다. 그의 시..
눈물 [김현승] 더러는 옥토( 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生命) 이고져 . . . . .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全體)는 오직 이뿐 ! 더욱 값진 것으로 들이라 하올제, 나의 가장 나아중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 김현승 (1913년~1975년) 시인 이 시는 1957년에 펴낸 김현승의 첫 시집 '김현승 시초'에 실려있다. 시집의 장정을 서정주 시인이 맡았다고 되어 있고, 가격은 육백환이라고 적혀 있다. 시인은 "하나에서 열까지 전부를 주선하여 준 서정주 시백의 우의에 깊이 감사를 드린다"고 자서에 썼다. 서정주 시인은 김현승 시인에 대해 "사람 사이의 정 (情)에 철..
산문(山門)에 기대어 [송수권]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하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니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날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날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옴을 * 송수권 (1940년 ~) 시인 하마터면 이 시는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