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길
[김정환]
철길이 철길인 것은
만날 수 없음이
당장은, 이리도 끈질기다는 뜻이다.
단단한 무쇳덩어리가 이만큼 견뎌오도록
비는 항상 촉촉히 내려
철길의 들끓어오름을 적셔주었다.
무너져내리지 못하고
철길이 철길로 버텨온 것은
그 위를 밟고 지나간 사람들의
희망이, 그만큼 어깨를 짓누르는
답답한 것이었다는 뜻이다.
철길이 나서 , 사람들이 어디론가 찾아나서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내리깔려진 버팀목으로 양편으로 갈라져
남해안까지, 휴전선까지 달려가는 철길은
다시 끼리끼리 갈라져
한강교를 건너면서
인천 방면으로, 그리고 수원 방면으로 떠난다.
아직 플랫포옴에 머문 내 발길 앞에서
철길은 희망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끈질기고 , 길고
거무튀튀하다.
철길이 철길인 것은
길고 긴 먼 날 후 어드메쯤에서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우리가 아직 내팽개치지 못했다는 뜻이다.
어느 때 어느 꼿에서나
길이 이토록 머나먼 것은
그 이전의, 떠남이
그토록 절실했다는 뜻이다.
만남은 길보다 먼저 준비되고 있었다.
아직 떠나지 못한 내 발목에까지 다가와
어느새 철길은
가슴에 여러 갈래의 채찍 자욱이 된다.
* 김정환 (1954년~ )시인. 소설가
'철길이 철길인 것은'하고 나직이 되뇌면 생각의 꼬리가 철길처럼 길게 이어지곤한다.
'철길이 철길인 것은' 하는 순간 수수께끼라도 떠안은 듯 뒷말을 잇도록 한다. 김정환 시인은 '철길이 철길인 것은'
되내며 (철)길과 만남과 희망을 엮어 이렇게 노래한다.
만날 수 없음이 이리도 끈질기기 때문이고,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아직 내팽개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아닌 게 아니라 '철길이 철길인 것은'하고 되내면 신촌역, 성북역, 용산역, 서울역을 오가던 아련한 철길들이 떠오른다.
그러니까 , 철로도 아니고, 절도도 아니고, 바로 '철길이 철길인 것은' 그 길이 인간 안쪽으로 뻗어 있기 때문이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철길은 두 개의 길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의 길과 또 하나의 길, 한 사람의 길과 또 한 사람의 길! 그 두 길은 서로 마주칠 수 없음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서로 버팅김으로써 지나감의 속도와 무게를 견뎌내는 길이다.
지금 당장은 만날 수 없는 길이지만, 언제나 함께 나아가는 길인 것이다.
'철길이 철길인 것은'시간의 누적인 역사(歷史)가 베어 있기 때문이다. 1899년 제물포에서 노량진을 오가는 경인선이
첫 경적을 올린 이후 철길은 격동의 근대사를 달렸다. 수탈하고 징병하고 피란 곳에서 나서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돌아간다. 상경하고 입영하고 귀대하고 여행하는 곳에 늘 철길이 있었다.
그러니 '철길이 철길인 것은' 그 길에 자갈돌처럼 까려 있는 기다림 때문이다.
그 기다림이 너무 길고 외로워서, 철길이 두 길이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철길이 철길인 것은' 끝이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철길을 사랑하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는 "이 살아있음이 언젠가는 끝이 있으리라는 것을/ 나는 믿고/ 또 사랑하는 것이"(<육교>)고,
"음침한 시대가, 끝났다는 듯이/기름 묻은 이슬이 검게, 선로 위에서 반짝인다/ 아직 젖어 있는 것은 무엇인가"
(<검붉은 눈동자>) 라며 희망을 놓지 않는 것이다. 고통도 절망도 이별도 끝이 있기 때문에 견딜 만한 것이고,
드디어 완성되는 것이고, 결국 희망적인 것이다. 그리하여 "철길은 희망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끈질기고, 길고/
거무튀튀한"것이다. 당신이든 미래든 휴전선 너머든 완행이든 급행이든, 바로 그곳까지 달려가는 것이 철길인 것이다.
-정끝별 .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