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잔나 2022. 1. 24. 12:32

 

 

 

푸른 곰팡이  - 散策詩

 

[이문재]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었습니다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편지는

 

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

 

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

 

가는 편지와 받아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

 

그대가 가고 난 뒤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일러스트- 잠산

 

 

 

 

* 이문재 (1959년 ~) 시인

 

이문재 시인의 시들은 치열하고 내부가 끓고있다. 

그의 시들은 결사 (結社)를 한다. 주로 도시와 문명의 급소를 공격해 단숨에 제압한다. 

시 '푸른 곰팡이'가 실려 있는 두 번째 시집 '산책시편' (1993)은 시단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는 이 시집을 통해 우리가 유토피아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도시적 공간의 무서운 (파시스트적인) 속도에

대항해 '게으르고 어슬렁거리고 해찰하는 ' 8편의 산책시 (散策詩) 연작을 발표한다.

그는 '아파트단지가/웨하스처럼, 아니 컴퓨터칩처럼/ 촘촘하게 박혀' 있는 곳을  느릿느릿 걷는다.

그는 '도시는 단 한 사람의 산책자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느림보는/ 가장 큰 죄인으로 몰립니다/

게으름을 피우거나 혼자 있으려 하다간/ 도시에서 당하고 말지요/ 이 도시는 산책의 거대한 묘지입니다'

(마지막 느림보 - 산책시3')라고 썼다.

시 '푸른 곰팡이' 에서도 느림을 예찬한다. 사랑도 산책 같아야 한다고 말한다.

사랑이 산책 같아야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사랑은 불꽃처럼 일어나는 것이지만 기다림과 그리움의 시간을 살면서 사랑은 무르익고 완성된다는 뜻 아닐까.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한 통의 편지를 써 보라.

아무리 격렬한 사랑에 휩싸인 사람일지라도 백지를 앞에 두면 말문이 막힐 것이다.

그러나 머뭇거림이 편지의 미덕, 지우고, 생각을 구겨 버리고, 파지 (破紙)를 내는 시간에 우리는 사랑의 감정을 솔직하게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나흘을 또 기다려 보라. 나의 편지가 사랑하는 이의 안뜰과 마루와 품에 전달되기까지의 그 시간을 마른 

목으로 가슴 설레며 살아보라.

푸른 강이 흘러가는 그 기다림의 거리를 살아보라. 

그러는 동안 사람은 푸른 강의 수심처럼 깊어질 것이다.  요즘 이문재 시인은 따뜻한 체온의 '손'을 주목하고 있다. 

나와 당신 사이에 '내미는 손'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근년에 발표한 시 '손은 손을 찾는다' 에서 '손이 하는 일은/결국 다른 손을 찾는 것이다/오른손이 왼손을 찾아/ 가슴 앞에서 가지런해지는 까닭은/ 빈손이 그토록 무겁기 때문이다/  미안함이 그토록 무겁기 때문이다' 라고 썼다.

그의 시는 도시와 문명에 단호하게 맞서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지만 그 속내에는 눈물이 그렁 그렁 괸, 그리워하고 연민하는 사랑의 마음이 산다.                 - 문태준 .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