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시몬느 드 보봐르 프랑스의 실존주의 작가였던 시몬느 드 보봐르 (1908.1.9~1986.4.14)는 자신의 저서 '제 2 의 성'에서 이렇게 말한다. '여성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 지는 것이다.' 또한 그녀는 '자기를 사물로 만들려는 유혹도 개인에게는 역시 존재한다. 그것은 불행한 길이다. 그럴것이 수동적이고, 소외되고, 버려진 그 사람은 초월에서 이탈되고, 모든 가치를 상실하여, 다른 사람의 의지에 의해서 창조된 존재로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안이한 길이다. 이와같이 해서 정당하게 인수해야 할 실존의 고뇌와 긴장을 회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자를 타자로 만들어버리는 남자는 여자 속에서 뿌리깊은 공모를 발견할 것이다. 이와같이 여자는 구체적인 수단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상호성을 인정받지 않고 자기가 남자에게 복종하는 것은 필연적인 기반이라고 느끼기 때문에, 또는 타자의 역할 속에서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주체가 되기를 요구하지 않는다.'라고도 말한다. 나혜석과 보봐르는 띠동갑이다. 그녀들은 같은 원숭이 띠로, 나혜석이 보봐르보다 열두살이 더 많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들은 닮은 게 참 많다. 만약 나혜석이 그 시대의 한국에 태어나지 않고 프랑스에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그녀는 분명 보봐르 보다 더 활동적이고 진취적이며 뛰어난 열정을 지닌 실존주의 작가와 페미니스트 그룹의 선두 주자로 이름을 날렸을 것이다. 또한 나혜석은 프리다 칼로 못지 않은 세계적인 화가가 돼 명성에 걸맞은 작품들을 우리에게 많이 남겨주었을 것이다. 나혜석은 늘 자신이 주체가 되기를 소망했다. 인습의 굴레에 얽매이지 않고, 여자라는 편견없이 하나의 인간으로 인정받길 원했다. 대부분의 딸들처럼 부모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고, 여자라는 이유로 금기시된 모든 규범을 말없이 따르며, 나이가 차기전에 출가하여 시부모님 봉양 잘 하고, 남편 뒷바라지와 육아에 혼신을 다 하는 그런 수동적인 모습이 아니라, 스스로의 삶속에 뛰어들어 척박하기 그지없는 여성의 위치를 개척하고 일구어 보다 능동적인 삶을 살고 싶었으리라. 나혜석은 자신의 생애에서 영원히 잊지못할 세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 남자들은 평화로웠던 나혜석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그 첫번째는 그녀의 첫사랑 최승구였고, 두번째는 남편 김우영이었으며 세번째 남자가 바로 그녀의 결혼생활을 파국으로 이끈 최린이라는 남자였다.
    (나혜석의 오빠 나경석) - 최승구와의 만남 최승구(崔承九)는 오빠 나경석의 친구였다. 오빠의 소개로 인사를 나눴던 사이였는데 나혜석이 1914 년 동경 유학생들 동인지인 <학지광>에 글을 올리게 되면서 학지광의 편집인이었던 최승구와 부쩍 가까워 진다. 이무렵 나혜석은 19 세의 성숙한 처녀로, 그녀의 다정다감하면서도 적극적인 성격과 뛰어난 미모는 모든 남자 유학생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했다. 최승구 또한 일본으로 유학온 유학생들 사이에서 천재로 알려졌던 사람이었다. 그는 일제치하의 울분과 저항정신을 고취한 시와 수필 등을 학지광에 발표했었고, 최승구의 재기발랄한 시재(詩才)는 일찍이 최남선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최승구는 시 뿐만 아니라 연극에서도 탁월한 재능을 보여 때론 본인이 쓴 극본의 연출을 직접 맡기도 했었다. 최승구에 대한 평가는 후대 사람들에 의해 이렇게 남겨진다. '최승구는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로부터 주요한의 <불놀이> 등 일련의 시작에 이르는 한국 근대시사에서 중간적 위치를 차지하 면서 시적 전환을 보여주고 있는 시인이다. 최승구가 담당한 과도기의 교량적 구실은 우리의 근대시사에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평가된다.' 운명의 수레바퀴는 이렇게 두 사람을 일본이라는 머나먼 타국으로 이끌고 와 동경에서 서로를 마주치게 한 것이다. 두 사람은 곧 깊은 사랑에 빠져든다. 그러나 오빠인 나경석은 친구로서의 최승구는 신뢰했지만, 동생의 남자친구로서의 최승구는 탐탁지 않게 여긴다. 그 이유는 최승구가 결핵을 앓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최승구에게는 이미 결혼한 본부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승구(崔承九)는 일찌기 부모님을 여의고 숙부집에서 자랐다.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숙부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충주 태생인 처녀와 결혼을 하게 된다. 결혼식 날 처음 만난 신부는 몸집도, 얼굴도 너무 크고 무식해 보여서 도통 최승구의 마음에 들지않았고, 최승구는 결혼식만 치렀을뿐, 몇 해를 두고 신부와 합방조차 하지 않았다. 동경에서 나혜석과 사랑에 빠진 최승구는 본처와 이혼을 한 뒤 나혜석과 결혼을 하기로 약속한다. 허지만 숙부에게 본처와 이혼을 허락해 달라고 사정하지만, 최승구의 숙부는 오히려 "첩을 들이는 것은 괜찮으나 이혼만은 절대 안 된다"며 허락하지 않는다. 결국 나혜석의 첫사랑은 최승구 집안에서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한다. 최승구의 가족들은 '고생한 조강지처를 버려서는 안된다'며 최승구에게 결혼을 말리는 한편 나혜석에게는 결혼을 허락할 수 없다고 통보한다. 1915 년 12 월, 최승구의 결핵 병세가 악화되어 최승구는 조선으로 돌아가 전남 고흥 군수로 재직하고 있던 형 최승칠의 집에서 요양을 한다. 그해 2 월경 나혜석은 최승구의 위독 소식을 듣고 기숙사를 몰래 빠져나와 배편으로 전남 고흥에 도착해 최승구를 만나고 간다. 그리고 일본에 도착했을 때 나혜석이 방문한 그 다음날 최승구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최승구는 겨우 스물 다섯해를 살다가 전남 고흥군 고흥읍 남계리 오리정 공동묘지에 속절없이 묻히고 만 것이다. 최승구의 죽음은 나혜석에게도 커다란 충격었다. 그 충격으로 인해 그녀는 한동안 신경쇠약에 걸린채 삶의 의욕마저도 상실해 버렸다. 그러나 그녀는 곧 자신의 절망을 딛고 일어나 자신을 추스린다. '머지않아 졸업을 하고 귀국하면 아이들을 가르치리라... 티없이 맑고 순수한 아이들의 눈망울을 만나게 되면 이 아픔도 얼마간 잊혀지리라...' 마땅한 배필감이 있으니 선을 보러 귀국하라는 아버지의 전언에도 딸인 혜석이 계속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아버지 나기정은 급기야 혜석에게 보냈던 학비를 끊어 버린다. 그러나 이에 굴복하지 않고 혜석은 휴학을 한 뒤, 함흥의 영생 중학교와 서울의 정신 여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며 학비를 번다. 학교에서 만난 어린 학생들의 반짝이는 눈망울과 티없는 미소를 보면서 그녀의 아픔도 차츰 잊혀져 갔다.
    (나혜석의 결혼사진) - 나혜석의 남편 김우영 1917 년 여름, 나혜석은 오빠 나경석으로부터 교토제국대학 법학과에 다니는 친구 김우영을 소개받는다. 그들이 살고 있는 수원 집으로 마침 김우영이 찾아온 것이다. 그 이후, 오빠 나경석의 강력한 권유로 두 사람은 도쿄와 교토를 오가며 본격적으로 만나게 된다. 그때 김우영은 3 년전 아내와 사별한 독신남이 었으며 자신보다 열살이나 연하인 나혜석에게 과분할 정도로 무한한 사랑을 주었고, 나혜석이 첫사랑의 상처를 잊을 때까지 그녀의 곁을 묵묵히 지켜주었다. 나혜석이 김우영과 가까워 진데에는 3.1 운동의 영향이 컸다고 볼 수 있다. 3.1 운동에 참가했다는 혐의로 나혜석이 붙잡혀 갔을 때 그녀의 변호를 하기 위하여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열성적으로 변론을 맡아주었던 김우영 덕분에 그녀는 5 개월 후 석방된다. 출옥 후, 앞으론 현실과 타협하며 살고자 마음 먹으면서 김우영의 구애를 받아들여 두 사람은 마침내 결혼한다. 나혜석의 남편 김우영은 지금의 부산 동래구에 있던 개양학교를 졸업하고 1906 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세이소쿠영어학교에서 2 년간의 수료후, 1909 년 일본오카야마 제 6 고등학교를 거쳐 1918 년 7 월 교토제국대학 법학부 법률학과 및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한다. 유학 중이던 1915년 1 월 교토 조선 유학생친목회를 조직한다. 1919 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경성에서 변호사를 개업하였고, 같은 해 12 월 조선 경제회 이사로 활동했었다. 1920 년 4 월에는 3·1 운동에 참여 했다가 체포된 배동석 등의 재판에 변호사로 참여했었고, 같은 해 11 월에는 대동단 사건의 재판에 변호사로 참여했으며 1921 년 5 월에는 강택진과 곽병도 등, 7 월에는 이원직과 김청풍 등의 군자금 모집 사건을 변호했다.
    신여자 2 (1920. 4 월) 1920 년 4 월, 신여자 잡지에 기고했던 그림과 글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저것이 무엇인가. 시속 양금 (바이올린)이라던가. 앗다 그 계집애 건방지다. 저것을 누가 데려가나 두 양반의 평 그것 참 예쁘다. 장가나 안들었다면.... 쳐다나 보아야 인사나 좀 해보지 - 어느 청년의 큰걱정 1921 년 9 월부터 1927 년 5 월까지 김우성은 일본 외무성 관리로 만주 안동현 부영사를 역임했고, 1932 년에는 전라남도 산업부 산업과 이사관으로 재직하였다. 1937 년에는 전라남도 산업부 상공과장을 지냈으며 1940 년 9 월에는 충청남도 참여관 겸 산업부 사무관으로 산업부장을 맡았다. 1943 년 9 월 중추원 칙임관 대우 참의를 지냈다.
    (세계여행을 떠나는 나혜석과 김우영) - 천도교 신파의 우두머리였던 최린 김우영과 나혜석 부부가 소련의 모스크바를 구경하고 폴란드를 거쳐 파리에 도착한 것은 부산진역을 출발한 지 꼭 한 달 만인 1927 년 7 월 19 일이었다. 혜석이 그리도 애타게 꿈꾸었던 파리였지만 두 부부는 잠시 떨어져 지내야 했다. 김우영이 베를린에서 약 3 개월 동안의 법률 공부를 하기로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기간동안 나혜석도 미술공부를 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혜석은 프랑스의 야수파 화가인 비시에르의 화실에 드나들면서 그림공부에 열중했다. 그림 공부를 하면서 혜석은 틈나는 대로 파리의 조선 유학생들과 어울렸는데, 혜석을 위한 유학생들의 환영회에서 최린을 만난 것이 그녀의 운명을 뒤바꿔놓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나혜석의 환영회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그 후 하루가 멀다하고 함께 붙어 다녔다. 조선인들이 많이 와 있던 파리에서 그들의 모습이 눈에 띄지 않을 리 없었다 최린은 1878 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는데, 나혜석 보다 무려 18 세나 연상이었다. 1901 년 일본 육군사관 학교 출신의 조선인 모임인 일심회에 가담한 그는 일심회가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주모자들이 체포되자 일본으로 망명한다. 1903 년 일심회의 연루자들에 대한 특사령이 내려지자 최린은 귀국해서 개화파의 주선으로 외부주사에 발탁된다. 그 다음해 황실 유학생으로 선발돼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부립 제일중학을 거쳐 메이지 대학 법과를 졸업한 그는 1909 년 귀국하여 1919 년 3·1운동 때 민족 대표 33 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가 검거돼 재판에서 3 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한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최린을 그들의 이른바 '문화정치'에 이용하고자 1912 년 12 월 그를 가출옥시킨다. 그 무렵부터 최린은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동조하는 움직임을 보인다. 최린이 1927 년 가을, 유럽에 온 것도 사실은 일본의 은밀한 사주를 받고 세계여행을 하던 도중이었다. 그 무렵의 어느 날 최린은 혜석과 함께 '세계약소민족회의'의 부회장이던 살레의 집을 찾아간다. 살레 내외와 환담을 나누던 혜석이 프랑스 가정에서 생활해보고 싶다고 말하자 부인이 쾌히 승낙해 혜석은 숙소를 살레의 집으로 옮기게 된다. 이를 계기로 혜석은 최린과 더욱 가까워져 마침내 혜석과 최린은 그해 11 월 20 일 파리의 셀렉트 호텔에서 처음으로 잠자리를 같이 하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그들의 관계는, 혜석이 남편이 있는 베를린으로 가기 위해 파리를 떠나는 12 월 20 일까지 약 한 달간 계속되었다. 최린과 헤어진 혜석은 베를린행 열차에 올라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남편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최린과 사랑을 나눈 것은 아니다. 남편을 사랑하는 것은 남편을 사랑하는 것이요. 최린을 사랑하는 것은 최린을 사랑하는 것이다. 나와 최린의 관계 같은 것은 유럽이나 미국의 진보적인 의식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최린과의 관계 때문에 남편과의 사랑이 더욱 두터워진다면 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나혜석과 김우영 부부 1928 년 12 월, 넉 달 만에 남편을 만난 혜석은 최린과의 일들이 다소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자기가 큰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다시 여행을 계속했다. 이탈리아, 영국, 스페인을 관광하고, 미국으로 건너가서 뉴욕, 필라델피아, 나이아가라 폭포, 시카고, 그랜드 캐니언, 로스앤젤레스, 마리포사 대삼림 등을 거쳐 샌프란시스코에서 배편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나혜석 부부는 하와이, 요코하마, 도쿄를 거쳐 1929 년 3 월, 21 개월간의 세계일주 여행을 마치고 부산항으로 무사히 귀국한다. 혜석의 시집살이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서울 집을 처분했으므로 마땅히 갈 곳도 없었고 그들의 수중에는 돈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김우영은 귀국한 지 며칠 후 변호사 개업을 준비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간다. 김우영이 상경한 뒤 혜석은 경제적인 어려움에 부딪혔다. 시댁 식구들도 모두 혜석의 눈치만 살피는 중이었고,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하던 중에 <별건곤>이라는 잡지사에서 인터뷰 요청이 왔다. '구미만유하고 온 여류 화가'라는 제목으로 그 인터뷰 내용이 잡지에 게재됐고, 기자와 혜석이 나누었던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적혀있었다. 기자 - "파리에서 우리 조선 사람들도 만나적이 있었나요?" 혜석 - "아..네에..최린 선생도 그곳에서 만났었지요. 아마 요 근래에 우리 조선 사람으로서 외국 유람 중에 그분처럼 큰 대우를 받으신 이가 없었을 것 같더군요.. 나도 그분을 퍽 흠선하였습니다." * 여기서 '흠선'이란 '우러러 공경하고 부러워한다'는 뜻이었다.
    농부 (판화) <별건곤>의 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나서도 혜석은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할 방도를 찾느라 잠도 못이루며 고심했다. 그러던 중 어느날 문득 최린이 생각났다. 최린이라면 불문곡절하고 그녀를 도와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혜석은 곧 최린에게 편지를 썼다. 간단한 안부인사에 이어서 '다시 사귀기를 바란다..틈나는 대로 내가 있는 곳(동래)으로 내려와 만났으면 좋겠다.' 혜석의 편지를 받은 최린은 고민에 빠졌다. 우선 귀찮다는 생각과 함께 파리와는 달리 조선 땅에서 혜석과 밀회를 계속하다가 아는 사람의 눈에라도 띄게되면 자신의 명성에 먹칠을 하게 될 것임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최린은 고민 끝에 자신과 친한 친구를 불러 이 문제를 의논했다. 그 친구는 김우영과도 막역한 사이였다. 최린은 혜석과의 관계를 다소 과장되게 털어놓으면서 혜석이 다시 만나자는 편지를 보냈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친구는 최린에게 "남편 김우영에게 알려 마누라 간수를 잘하게 하는 수밖에 없다." 는 의견을 내놓았다. 최린은 그 이야기가 김우영에게 전해졌을 때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생각해 보았으나 자신이 별로 손해볼 일은 없겠다 싶어서 친구에게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친구는 김우영을 만나 혜석이 최린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이야기를 전하면서 '다시 사귀기를 바란다'는 대목을 ' 내 평생을 당신께 맡깁니다'로 부풀려 말했다. 그는 그 얘기를 김우영에게만 이야기한 게 아니라 자기 주변의 많은 이들에게도 똑같이 전했다. 김우영은 그 무렵부터 구체적으로 이혼을 생각하기 시작했는데, 때를 맞춰 잡지에 '흠선…'이라는 기사가 실리고 뒤이어 혜석의 편지 사건이 터졌던 것이다.
    김일엽 선생의 가정생활 (1920, 6 월 신여자 4 ) 혜석은 동래에 있었던 탓으로 서울 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최린에게서 답신이 오지 않는 것도 그저 그가 바쁜 일과를 보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혜석은 동아일보 수원지국의 요청으로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유럽과 미국을 여행하던 중 그린 그림과 유럽에서 구입해온 복제그림들을 함께 전시하는 전시회였다. 혜석이 서울에서 돌아가는 사정을 대충이나마 알게 된 것은 전시회가 끝난 얼마 후였다. 서울에서 혜석을 만나러 동래에 내려온 친구가 혜석과 최린에 대한 소문이 퍼져, 가는 곳마다 화제가 되고 있다는 이야기와 함께 김우영에게 여자가 생겨 방탕한 생활 속에 빠져들고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주었다. 혜석은 믿을 수가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 뭔가 해결되리라는 생각과 함께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일로 이 괴로움을 달래고자 스스로 다짐하곤 했다. 혜석이 서울을 다녀간 후 김우영은 하루가 멀다 하고 우편으로 이혼을 독촉하는 편지를 보내왔다. 이혼장에 도장을 찍지 않으면 간통죄로 고소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혜석은 서약서의 자기 이름 곁에 도장을 찍었다. 며칠 후 혜석이 그래도 설마 하는 심정으로 부청(府廳)에서 호적을 떼어봤더니 1930 년 11 월 20 일자로 이혼이 성립돼 있었다. - 김우영은 혜석과의 이혼이 마무리되고, 혜석이 동래 집을 떠나던 무렵 조선총독부로부터 집요한 공세를 받고 있었다. 관직을 맡으라는 것이었다. 세계여행을 다녀온 뒤 조선총독부의 사무관으로 일하라는 외무성의 제의도 완강하게 거절했던 그였다. 그것이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민족적 양심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의욕을 가지고 다시 시작했던 변호사 일은 경제적으로 그에게 아무런 보탬도 되지 않았다. 오히려 빚만 늘어가는 형편이었다. 혜석은 계속해서 재산 분할을 요구해왔고, 동래 본가에서는 생활비를 내려보내라고 시시각각 압박해 오고 있었다. 신정숙을 새 아내로 맞아들이고 아이들까지 올라오게 하니 돈 들어갈 곳은 더욱 많았다. 도무지 탈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김우영에게는 더 이상 버텨낼 힘이 없었다. 그는 결국 총독부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전라남도 이사관직을 받아들여 가솔을 이끌고 임지인 광주로 부임한 것은 혜석이 금강산에서 그림에 몰두하던 1931년 봄이었다. - 나혜석의 미술작품 작품경향은 크게 2 기로 나눌 수 있는데, 파리에 가기 이전에는 주로 사실적인 수법으로 인물과 풍경을 그렸으며, 그 뒤로는 야수파와 표현파 등의 영향을 받아들인 한결 참신한 수법을 보였다. 그녀의 작품 중 '자화상'은 30 년대에 그린 이 유화는 서구적 신여성의 우아한 자태를 묘사한 수작으로 평가된다. 그녀의 '자화상'에 대해 미술평론가 이구열은 "1930 년 당시 이처럼 창조성이 내포된 자화상은 단 한 점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구도, 표현, 색상 모두 놀라울 정도로 뛰어납니다. 천재 화가를 포용하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쉬울 뿐이죠." 라고 평하였다. 작품 '해인사의 풍경'은 겹겹이 두꺼운 붓질로 사물의 윤곽과 초점을 흐린 나혜석의 독특한 기법이 발휘되고 있으며 화면 전면의 탑뒤로 대웅전의 일부가 보인다는 평이 있다. 예술의전당 정형민 전시예술감독은 "예술적 수준을 논하기 이전에 나혜석의 공간과 시간속으로 다가가 조금씩 지쳐가기 시작하는 작가의 숨결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그녀는 파리의 야수파계 미술연구소에서 새로운 예술성에 눈을 떴다. 사실을 주관적 시각으로 재구성하고 활달한 필치와 자유분방한 색채로 표현해냈다. 대상을 단순화시키고 색채를 강렬하게 구사하였다. 그녀의 풍경화에는 섬세한 필선, 밝고 고운 색조, 구도의 신선함을 활용하였다 1921 년 그녀가 '개벽'지 제13호에 발표한 목판화 '개척자'는 판화의 효시의 하나로도 손꼽힌다. 또한 나혜석은 한국 유화를 정착시킨 최초의 전업 화가였다. 미술작품을 본격적으로 제작해 전시·판매 등을 통해 전업화가의 기초를 닦은 선구적 예술가이기도 했다. 많은 선배 남성 화가들이 시대를 한탄 하며 붓을 꺾었을 때에도 이에 굴하지 않고 남들이 알아주든 말든 그림을 그렸다. 그녀의 작품은 주제도 다양했고, 소재도 다양하였다. 수차례 개인전과 '조선미전' 전람회 등을 통해 유화라는 새로운 표현 매체의 위상을 확립 했고 작품을 판매하여 직업으로서의 화가 생활을 영위하였다. 동료 문인인 이광수외 염상섭 등의 소설, 저서에 삽화를 해주기도 했고, 신문에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유화 외에도 데생, 판화, 목각화, 석각화, 조각, 신문 삽화, 책의 삽화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또한 작품에 정치색은 띄지 않으면서도 당시 사회상, 일상 풍경 등을 세밀 하게 묘사하기도 했다. 인물화와 초상화를 그렸는데 정밀한 묘사에서 단순한 묘사 등 다양한 기법을 썼다. 또한 종종 누드화를 그리기도 했다. - 나혜석의 문학작품 나혜석은 그림뿐 아니라 새로운 시대감각을 담은 소설과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1918 년에 쓴 소설 「경희」는 뚜렷한 여성의식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녀의 소설 작품은 고백체 소설이었다. 이는 1920 년에서1930 년대의 소설의 사조이기도 했다. 1918 년 도쿄 여자친목회 기관지 ‘여자계’에 발표된 단편 ‘경희’는 일본 유학생인 신여성이 구여성을 설득하며 자아를 발견해 나가는 과정을 실감있게 그리고 있는 자전적 소설이다. ‘경희’는 1910 년대 가장 빼어난 소설로 꼽힌다. 시 '노라를 놓아주게'에서는 유교의 삼종지도를 비판하였다. '노라를 놓아주게' 등에서 그녀는 가부장제 하에서 아버지만을 따르고, 남편만을 따르고, 아들만을 따라야 된다는 것이 잘못임을 비판하였으며, 아버지의 착한 딸, 남편의 착한 아내, 아들의 좋은 어머니 역할을 인형에 빗대어 표현하였다. 1937 년 10 월에 발표한 '어머니와 딸'에서 나혜석은 자신이 이혼 직후 머물렀던 어느 하숙집에서 본 구식 어머니와 신식 공부한 딸의 갈등을 표현하였다. - 역사학자이자 경희대학교 교수인 허동현은 "가부장권과 군국주의가 지배하던 그때 남녀동권을 꿈꾼 그녀의 삶은 실패로 예정 되어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때 치열한 삶을 산 나혜석은 오늘 수많은 알파걸들 을 낳게 한 한 알의 밀이었다." 고 평가하였다. 문학평론가 정규웅은 "세상은 나혜석을 외면했다. 외면만 한 것이 아니라 질시하고 냉소했다. 당대의 폐쇄적 사회 구조가, 뒤틀린 의식 구조가 그를 파멸로 몰아넣고 죽음에까지 이르게 했다." 고 평하였다. 또한 정규웅은 “나혜석의 파멸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지만 그것은 오직 나혜석 한 사람의 탓 만은 아니었다. 나혜석을 파멸 속으로 몰아넣고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우리 사회의 제도와 인습 그리고 사람, 곧 우리들 자신이었다” 고 지적한다.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 한국학 교수 박노자는 그녀를 영웅이라 평했다. "이혼 고백장 (1934 년)을 통해 남편 김우영과의 이혼 과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무책임한 애인 최린에게 '정조 유린에 대한 위자료'를 요구하여 합의금을 받아낸 화가이자 문필가인 나혜석은 진정한 '영웅'으로 보입니다." 라고 말했다. 미술평론가 이구열은 "나혜석이 창조적 화법을 뚜렷하게 정립시키지 못했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지만 그녀는 굉장한 저력을 가진 작가였으며 이혼당하지 않고 작품 활동을 계속했더라면 더 훌륭한 화가가 됐을 것" 이라고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 한편 '나혜석은 자신의 주체적 판단에 의거하여 세계를 해석했고, 그 해석을 공표했을 뿐이다. 그러나 세계는 그것을 저주했다. 왜냐하면, 여성주의 조차도 남성들이 쳐놓은 테두리 안에서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나혜석은 그 테두리를 넘었고, 그리고 오만방자하게도 자신의 일탈행위를 담론화하려고 했다.'는 시각도 있다. 1935 년 그녀가 쓴 글을 다시한 번 읽으면서 나혜석에 대한 포스팅을 여기서 이만 끝내고자 한다. '결코 손을 대서는 아니된다고 한 과실에 손을 댄 것은 뱀의 유혹이었고 이브의 호기심이 아니었나...' '나는 확실히 유혹을 받았었고 나는 확실히 호기심을 가졌었다. 우리는 황무(荒蕪)한 형극의 길가에서 생각지 않은 장미화를 발견한 것이다. 방향과 밀봉(蜜蜂)중에 황홀하였던 것이다." - '신생활에 들면서' 1935. 2 참고 - 위키피디아 백과사전
    출처 : ♣ 이동활의 음악정원 ♣
    글쓴이 : 감꽃향기 원글보기
    메모 :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5/03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