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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망록

 

 

 [김경미]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

깨어보니 스물네살이었다. 

신(神)은, 

꼭꼭 머리카락까지 졸이며 숨어있어도 끝내 찾아주려 노력하지 않는 거만한 술래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타인은 고스란히 이유 없는 눈물 같은 것이었으므로.

 

 

스물네 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 밖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려나가 문 열어보면

아무 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슬밭을 툭툭 털어내며 인사했다.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석류 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네 살엔 좀 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입술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 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리 많은 남은 행복과 거짓에 이젠 눈발 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줄런지.

아무 일 아닌 듯 해도.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야 

문득 깨어나 스물다섯이면 쓰다 남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날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무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일러스트 -잠산

 

 

 

 

* 김경미 ( 1959년 ~) 시인 . 방송작가

 

 

누구든지 삶의 중요한 골자를 적는 하나의 비망록을 갖고 있다. 

생(生)의 사건은 낙차가 있고 , 중립 (中立)이 없으므로, 그 자체가 강렬하지 않은 생(生)의 시간은 없다. 

어떤 과거는 해약하고 싶어진다.  어떤 과거는 지금에라도 더 꽃피우고 싶어진다. 

어느 때는 폭풍이 지나가는 바닷가처럼 스산하고 절벽처럼 위태위태해 시큰한 냉기가 돌기도 한다. 

어느 때는 사랑이 붉은 가슴에게로 오지만 눈물의 손바닥이 얼굴을 덮는 밤도 있다. 

우리는 이 사건들을 모두 속기 할 수는 없다, 갈피를 잡지 못해 헤매는 미망 (迷妄) 속에 살면서 잊을 수 없는 미망 (未忘)만을 기록할 뿐. 김경미 시인의 데뷔작인 이 시에는 스물네살에서 스물다섯 살로 넘어가는 나이의, 섬세한 감성을 소유한 여성이 등장한다.  

신(神)은 그녀의 절망을 구원하지 않았고, 그녀가 만나는 이들은 팔뚝으로 눈물을 훔쳤으며, '산두목 같은 사내' 는 끝내

그녀의 사랑이 되지 못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네 살.  그러나 젊은 열정이 어딘들 못 나서랴.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그에 젊은 열정은 생의 (生意)를 내는 것. 마치 견고한 배는 풍랑엔 해를 입지 않듯이.

미래에 대한 이 적극적인 의욕은 시 <겨울 강가에서>에도 드러난다.  " 딸아 기다림은 이제 행복이 아니니/ 오지 않는 것은/ 가서 가져 와야 하고/ 빼앗긴 것들이 제 발로 돌아오는 법이란 없으니/ 네가 몸소 가지러 갈 때/ 이 세상에/ 닿지 않는 곳이란 없으리". 그러나, 이 굽히지 않는 마음이 20대의 젊음에게만 있을쏜가.

우리는 또 내일을 만나고, 내일은 공백 (空白)의 페이지이고, 내일은 새롭게 써야 할 비망록인 것을.

고형렬 시인의 표현대로, 김경미 시인은 "맵차고도 직정적인 여성시인"이다. 

그녀는 자기 혐오와 자기 부정을 통해 자신과 전면전을 치르는 시인이다. 해서 그녀의 시는 이 세상의 패악함과 간활함에 맞선다.  시 <나의 서역>의 도발적인 허무는  또 어떤가.  "서로 편지나 보내자 삶이여/ 실물은 전부 헛된 것/ 만나지 않는 동안만 우리는 비단 감촉처럼 사랑한다 사랑한다 죽도록/ 만날수록 동백꽃처럼 쉽게 져버리는 길들/ 실물은 없다 아무곳에도/ 가끔 편지나 보내어라" .

이렇게 솔직하게 속내를 꺼내 보이는 시를읽고 나면 우리는 다시 만나고 싶어진다. 다시 만나 동백꽃처럼 모가지를 꺾으며 서로를 외면하게 될지라도 . 다시 만나 과거의 비망록을 다시 열람하려는 용기, 그것이 우리의 가슴에 아직 남아있는  그리움 아니겠는가.                  -문태준.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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