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 나무로부터 봄 -나무에로 [황지우]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 (零下) 십삼도 (十三度) 영하 (零下) 이십도 (二十度) 지상(地上)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 나목(裸木)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 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 받은 몸으로, 벌 받은 목숨으로 기립 (起立)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零下)에서 영상 (零上)으로 영상 (零上) 오도 (五度) 영상 (零上) 십삼도 (十三度) 지상(地上) 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
이탈한 자가 문득 [김중식]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 김중식 ( 1967년 ~) 작가. 시인 이 시를 읽고 있으면 미국의 대표적인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 가지 않은 길 ' 이 생각난다. 노란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으니, 나는 풀이 더 많고 사람..
의자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능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 이정록 (1957년 ~) 시인 어른의 말씀을 받아 적기만 해도 시가 될 때가 많다. 주름살 사이에서 나온 말씀이기 때문이다. 짧고 두서없이 울퉁불퉁 불거져 나온 말이지만 마늘처럼 매운 맛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어머니가 무심코 던진 말씀으로부터 태어났다...
반성 704 [김영승] 밍키가 아프다 네마리 새끼가 하도 젖을 파먹어서 그런지 눈엔 코가 푸석푸석 하얗게 말라붙어 있다 닭집에 가서 닭 내장을 얻어다 끓여도 주어보고 생선가게 아줌마한테 생선 대가리를 얻어다 끓여 줘 봐도 며칠째 잘 안먹는다 부엌 바닥을 기어다니며 여기저기 똥을 싸 놓은 강아지들을 보면 낑낑낑 밍키를 보며 칭얼대는 네 마라 귀여운 강아지를 보면 나는 꼭 밍키의 남편 같다. * 김영승 ( 1959년 ~) 시인 김영승은 반성의 시인이다. 그는 술이나 잠에서 반쯤 깬 반성(半醒)의 시인이고 기존의 서정시로부터 반 옥타브쯤 들떠 읊조리는 반성(半聲)의 시인이다. 가난과 무능으로 일그러진 욕망의 고백을 일삼는 반성의 시인이고 구도자적 치열함으로 당대와 스스로를 부정하는 형이상학적 반성(半聖)의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