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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꽃
[어효선]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꽃밭 가득 예쁘게 피었습니다.
누나는 과꽃을 좋아했지요.
꽃이 피면 꽃밭에서 아주 살았죠
과꽃 예쁜꽃을 들여다 보면
꽃속에 누나얼굴 떠오릅니다.
시집간지 온 삼년 소식이 없는
누나가 가을이면 더 생각나요
과꽃 닮은 누나. . .보고 싶은 우리 누나
* 어효선 ( 1925년 ~2004년) 문화예술인
이 시의 핵심은 첫머리에 나오는 '올해도'라는 구절이다.'올해도 과꽃이 피었다'는 것은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또 그 전해에도 과꽃이 피고 짐이 한결같았다는 이야기다.
말하자면, 그것은 자연의 순환과 생성의 법칙을 함축하고 있다. 꽃의 피고 짐은 변함없다.
때가 되면 꽃은 피고 진다. 그러나 사람의 일이란 꽃과 다르다.
이 시의 2연에 나오는 '누나'의 경우만 봐도 그렇다. '올해도' 과꽃은 피는데 시집간 지 온 삼 년이 된 누나의 소식은 알 수 없다. 이 누나와 관련하여 확실한 것은 다만 그녀가 과꽃을 좋아했다는 사실뿐이다.
그래서 누나는 과거형으로 추억될 수밖에 없다. 누나는 과꽃을 '좋아했고' 그 꽃이 피면 꽃밭에서 '살았었다'.
이 시에 나오는 '좋아했지요'와 '살았죠'가 가슴 아픈 것은 그 때문이다.
사실 이 '소슬한 슬픔'은 우리 시의 기본 정조이기도 하다.
우리 시는 이런 누나들을 꽤 많이 알고 있다.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를 위시하여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에 이르기까지 우리 시가 노래하는 누나들은 주로 장미보다는 갈잎이나 국화, 과꽃 등과 같은 소박하고 평범한 심상들과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생의 조락은 언제나 '누나'들의 몫이다. 그녀들이 "가을이면 더 생각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파란 마음 하얀 마음>, <꽃밭에서> 등 주옥같은 동시들을 많이 만들어낸 어효선은 1925년 서울 종로에서 태어나
2004년 고인이 될 때까지 서울을 벗어나지 않고 살았다. 50년 전 서울을 회상하는 <<내가 자란 서울>>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동시대 다른 시인들이 여전히 전통적인 자연을 노래하는 농경민적 상상력을 선보일때 그는 여염집
화단에 앞다투어 피어나는 화초들을 기리거나 도시의 일상풍경을 산뜻하게 재연해내는 데 주력했다.
"뒷골목 한약국은/ 내가 어디 아프면,/ 할아버지가 데리고 가시는 집." (< 한약국 할아버지>)이나 "창이랑 징이랑/
좌악 벌여 놓고./ 학교 길에 앉았는/ 신기료 장수." (< 신기료 장수>) 라는 대목은 도시의 뒥솔목을 뛰어다니는 소년들의
감수성이 아니라면 포착하기 어려운 풍경이다.
어효선에 와서 우리 동시는 드디어 도시 소년들의 삶을 노래할 수있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과꽃>의 소년 역시 낯설지 않다. 그는 오늘날 도시인들의 잃어버린 유년이자 과거다.
우리에겐 여전히 '꽃밭'이 필요하다.
- 신수정 . 문학형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