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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
[이 상]
꽃이 보이지 않는다.
꽃이 향기롭다.
향기가 만개한다.
나는 거기 묘혈을 판다.
묘혈도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묘혈속에 나는 들어 앉는다.
나는 눕는다.
또 꽃이 향기롭다.
꽃은 보이지 않는다.
향기가 만개한다.
나는 잊어 버리고 재차 거기 묘혈을 판다.
묘혈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묘혈로 나는 꽃을 깜빡 잊어버리고 들어간다.
나는 정말 눕는다.
아아.
꽃이 또 향기롭다.
보이지 않는 꽃이 - 보이지도 않는 꽃이.
* 이 상(李箱) 시인. 소설가 (1910년~1937년)
아마도 시인은 꽃이 핀 것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꽃잎이 둥글게 열리는 것과 꽃의 둘레를 달무리처럼 둥글게 감싸는 향기를 맡고 있었을 것이다.
시인은 그 둥근 공간에 들어가 자신의 몸을 눕힌다.
죽은 사람의 몸이 놓이게 되는 무덤의 구덩이 부분이 묘혈인데, 그처럼 오목하게 파인 곳에 자신의 몸을 눕힌다.
이 시는 시인의 다른 시에 비해 비교적 쉽게 읽히는 편이지만 문제적이기는 마찬가지다.
밝게 만개한 꽃과 비산하는 꽃 향기의 반대편에 차디찬 주검과 서늘한 묘혈을 배치하고 있다.
열린 공중과 유폐된 땅 속, 두 공간은 서로 차단되어 멀리 떨어져 있다.
시인은 이 이격된 거리를 가파르고 낙차가 큰 절벽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이 시에도 병이 든 육체를 바라보는 시인의 황폐한 자의식이 드러나고 있다.
李箱 (본명은 김해경) 은 실험적인 글쓰기를 보여준 시인이자 소설가이다.
기이한 발상과 국어 문법을 파기한 그의 작품들은 당시에도 지금에도 파격 그 자체이다.
절망적인 근대의 시공간을 살아가는 자아의 분열과 의식과잉을 그는 익히지 않고 날것 그대로 드러냈다.
해서 그의 작품들은 수많은 연구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해독 불가능한 상태로 남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한 (오감도)는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독자들의 거센 항의가 빗발쳐 연재 15회 만에 전격적으로 연재가 중단되었다.
(독자들은 이상의 시에 대해 "개수작", "미친 놈의 잠꼬대"등의 화포와도 같은 말들을 동원해 비난을 퍼부었다.
시인 이상에 대한 문단의 평가는 온도차가 뚜렷했다.
희대의 문제아였고, 모던 보이였고, 모더니스트였고, 천재작가였으며, 이상은 사람이 아니라 사건" (고은)이었고,
"모국어의 훼손에나 기여한 시인"(유종호)이었으며, 그는 "잉크로 글을 쓰지 않고 스스로 제 혈관을 짜서 시대의 혈서를 썼다"(김기림). 그러나 이상은 다방면에서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는 미술에 솜씨가 있어 하융(河戎)이라는 이름으로 박태원의 신문연재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삽화를
직접 그렸다. 그의 시는 숫자와 도형의 사용, 공간 분할 등을 보여주는 바, 이것은 그가 한때 조선총독부 건축과
기수로 일한 전력과 무관하지 않았다. - 문태준 시인 -
허각 (Huh Gak) – Someday (그 시간, 그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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