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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비
[권오순]
송알송알 싸리잎에 은구슬
조롱조롱 거미줄에 옥구슬
대롱대롱 풀잎마다 총총
방긋 웃는 꽃잎마다 송송송
고이고이 오색실에 꿰어서
달빛 새는 창문가에 두라고
포슬포슬 구슬비는 종일
예쁜 구슬 맺히면서 솔솔솔
우리말의 아름다움, 구절마다 '송송송'
* 권오순 (1919년 ~1995년 ) 아동문학가
어떤 사람에겐 시를 쓰는 것이 자신의 불우를 견디는 힘이 된다.
이 시를 쓴 권오순의 경우가 그러하다.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그녀는 세 살 때 소아마비로 장애인이 되었다.
몸이 불편한 그녀가 택한 길은 시를 쓰는 것. 1933년 <<어린이>>지에 <<하늘과 바다>>가 입선되기까지
그녀는 학교에 가지 않은 채 혼자 집에서 창작에 전념한다.
1937년 <<카톨릭소년>>에 발표된 이후 그녀의 대표작이 된 이 시는 그 과정의 산물이다.
비가 내린다. 싸리잎에도, 거미줄에도, 풀잎에도. 또 꽃잎에도 . 이 비는 장대처럼 쏟아지는 소박비도 아니고,
감질나게 내려앉는 보슬비도 아니다.
그것은 '포슬포슬' 내린다. 비 내리는 바깥을 마음껏 돌어다녀보지 못한 소녀가 그 비를 바라본다.
소녀는 비를 맞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잘 알지 못한다.
소녀에게 비는 다만 영롱한 구슬처럼 반짝일 뿐이다. 비는 '송송송' 내리고 '솔솔솔' 맺힌다.
권오순은 이 시를 통해 우리말 형용어의 외연이 얼마나 넓은지 그 스팩트럼을 화려하게 보여주었다.
싸리잎 위로 비는 '송알송알' 내리고, 거미줄에 비는 '조롱조롱' 맺힌다.
풀잎에 맺힌 빗방울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우리말의 ㅇ과 ㄹ의 '흘러내리고 튀어 오르는 ' 감각을 극도로 활용한 이 의태어들은 구슬비를 수식하는 형용어로 모자람이 없다.
이 말들이 있는 한 우리말은 '고이고이 오색실에 꿰어서 달빛 새는 창문가' 에 두고 싶은 보물과 같다.
시인이 우리말의 정부 (政府)라는 말은 그래서 나온 이야기일까.
"꽃바구니에/ 또그르르. . . / 굴려 보고 싶다 // 옥항아리에 꽂으면/ 하이얀 방울 꽃내음/ 퐁퐁 솟겠다." (<봄 아침 멧새소리>) 청각을 또 다른 감각으로 재현하는 권오순의 재능은 이 시에서도 돋보인다.
봄날 아침의 멧새소리는 꽃바구니와 수정 쟁반, 그리고 옥항아리와 만나 '퐁퐁' 솟아오르는 '꽃내음'이 된다.
'소리'는 보는것으로부터 더 나아가 급기야 냄새로 전환되기까지 한다.
이런 감각은 평생 '소녀'로 살다간 자의 것이다.
해방이 된 뒤 단독 월남한 권오순은 재속수녀가 되어 성당에서 세운 고아원의 보모로 봉사하게 된다.
평생 독신으로 살다간 그녀에게 우리가 보인 관심은 충주호 부근의 시비뿐이다.
외롭고 가난한 그녀가 그토록 맑고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있었던 것은 기적에 가깝다.
시의 나라의 수수께끼다.
- 신수정 .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