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가 아플때 [정두리] 조용하다. 빈집 같다. 강아지 밥도 챙겨 먹이고 바람이 떨군 빨래도 개켜 놓아 두고 내가 할 일이 뭐가 또 있나. 엄마가 아플 때 나는 철든 아이가 된다. 철든 만큼 기운 없는 아이가 된다. 엄마 없는 생활의 '그림자' * 정두리 (1947년 ~) 시인. 아동문학가 일년 내내 휴일이 없고, 날마다 나라가 법으로 정한 노동시간을 넘겨 잔업 근무를 하는 일꾼이 있다. 이 노동자의 이름은 '엄마' 다. 아비와 자식들은 엄마를 초과 근무로 내몰며 근로기준법을 예사로 위반한다. 가난하던 시절 우리 엄마들은 식구들이 다 먹는 고기를 마다 했도, 한 그릇씩 공평하게 돌아간 자장면은 속이 거북하다며 먹성이 왕성한 동생에게 반 넘게 덜어주셨다. 미식이나 별미는 물리고 부엌에서 혼자 찬밥과 김치만..

오빠 생각 [최순애]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꾸새 숲에서 울 때 우리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 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귓들귓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가슴 뭉클하게 만드는 단어 '오빠' * 최순애 (1914년~1998년 ) 시인 이 시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거의 국민가요 수준에 이른 이 시를 노래한 가수만 해도 여럿이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조용필의 은 언제 들어도 절창이다. 그러나 이 시가 12살 소녀에 의해 씌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최순애. 1925년 11월, 12살 소녀 최순애는 으로 방정환이 내던 잡지 의 동시란에 입선자가 된다. 그 다음 해 4월..

감자꽃 [권태응] 자주꽃 핀 건 자주 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자연에 순응하는 생명의 경이로움 * 권태응 ( 1918년 ~1951년) 시인 은 단순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진국이 우러나오는 수작이다. " 자주꽃 핀 건 자주 감자" ,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다. 단순하고 명쾌하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드러냄이 라는 진리와 더불어 종 (種)의 명령에 순응하는 개체의 숭고함을 보여준다. 자주꽃 핀 데 하얀 감자가 달리지 않고, 하얀 꽃 핀 데 자주색 감자가 달리지 않는다. 무릇 생명 가진 것들은 그 종의 진실을 거스르지 않는다. 우리는 말마다 이 기적과 신비를 체험하며 이 우주 안에서 거대한 생명의 코러스에 참여하는 것이다. 본디 감자..

콩, 너는 죽었다 [김용택] 콩타작을 하였다 콩들이 마당으로 콩콩 뛰어나와 또르르또르르 굴러간다 콩 잡아라 콩 잡아라 콩 잡으러 가는데 어, 어, 저 콩 좀 봐라 구멍으로 쏙 들어가네 콩, 너는 죽었다 어린 아이 마음을 닮은 '섬진강 시인' * 김용택 ( 1948년 ~) 시인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은 알고 보면 동시집 의 저자이기도 하다. 전북 임실의 덕치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던 그에게 동시집은 썩 잘 어울리는 짝 같다. 사실, 그의 시는 이미 동시의 세계와 별로 구분되지 않는 어떤 영역 속으로 들어간 지 오래다. 소설가 이병천의 지적처럼 추사 선생이 완성의 경지에 이르러 동자체 (童子體) 글씨를 선보이게 된 과정과 비슷하다고 할까 동서고금의 숱한 대가들이 걸어갔던 그 경지를 우리는 탈속이라 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