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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한 영혼을 위하여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희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고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시름많은 사람들과 "어두운 땅 한 평 가꾸다 갈래요/ 우리나라 하늘 한 평 비추다 갈래요"라고 노래했던 시인
고정희(1948 ~1991). 이 시를 읽고 있으면 마치 그녀가 상한 영혼의 곁에 앉아 작은 목소리로 "흙에 심은 뿌리 죽는 법 보았나요"라고 묻는 것 같다.
평론가 김주연이 분석한 대로 이 시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신다"는 성경의 말씀과
겹쳐 읽힌다. '하늘 아래'라는 표현도 예수의 언약과 임재(臨在)를 둥글게 포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내 넋으로 기댈 곳 없이 큰 고통에 놓여있는 사람들을 힘껏힘껏 껴안고 살겠다는 강한 의지를 이 시는 보여준다.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했고 다분히 기독교적인 신앙에 기초한 시편들을 써낸 고정희 시인은 기독교의 현실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칼을 들이댔다. "하느님을 모르는 절망이라는 것이 얼마나 이쁜 우매함인가" 라고 질문했고, 동시에 "하느님을 등에 업은 행복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맹랑한 도착 신앙인가"라며 고민했다.
그녀가 비판하고 날카롭게 투시한 대상은 눈앞의 현실 그 자체였으며, 돌봄이 있는 따뜻한 공동체는 그녀가 꿈꾸는 세계였다. 고정희 시인은 한 생애를 정열적으로 살다 간 여성운동가이기도 했다.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을 지냈고, 여성주의 문화집단인 '또 하나의 문화' 창립 동인으로도 활동했다.
"제도적 억압의 굴레를 극복하려는 힘, 그것이 자유 의지라고 말할 수 있다면 나의 시는 항상 자유 의지에 속해 있는 하나의 에너지"라고 자평했는데, 조금의 호락호락함도 없이 평소 신념을 시 창작과 생활에서 실청했다.
한 시대의 깊고 어두운 계곡을 묵상했으므로 그녀의 시는 80년대의 격문이면서 '우릉우릉 폭발하는 화산(火山)'이었다.
1991년 6월 지리산 뱀사골을 오르다 폭우로 불어난 물에 휩쓰려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충격적인 죽음을 생각하면 생전에 쓴 시 '지리산의 봄1- 뱀사골에서 쓴 편지'가 자꾸 떠오른다.
"아득한 능선에 서 계시는 그대여/우르르우르르 우뢰 소리로 골짜기를 넘어가는 그대여/ (...) /아름다운 그대 되어 산을
넘어갑니다/ 구름처럼 바람처럼/ 승천합니다" 라고 쓴 시.
그녀의 시를 읽고 있는 오늘 새벽은 내 가슴이 아프다. - 문태준 시인 -
* 고정희 시인 (1948~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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