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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능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 이정록 (1957년 ~) 시인
어른의 말씀을 받아 적기만 해도 시가 될 때가 많다.
주름살 사이에서 나온 말씀이기 때문이다. 짧고 두서없이 울퉁불퉁 불거져 나온 말이지만 마늘처럼 매운 맛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어머니가 무심코 던진 말씀으로부터 태어났다.
허리가 아픈 어머니는 앉아 쉴 곳이 눈에 밟혔을 것이다.
어디건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허리를 펴고 싶었을 것이다. 이 시가 심상찮은 것은 의자를 내놓을 데를 태연무심하게 열거하는 어머니의 품 큰 생각에 있다.
사람뿐만 아니라 꽃과 열매와 참외밭과 호박과 망자 (亡者)에게도 의자를 내주어야 한다는 그 우주적인 마음 씀씀이에 있다. 공생과 배려에 기초한 이런 모성적 마음씨는 식구를 다 거둬가며 밥을 먹여온 삶의 연륜에서 생겨난 것이리라.
(우리의 어머니가 아니라면 누가 인생을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것이라고 먹줄을 대듯 명쾌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이정록 시인의 시에는 모자 (母子)가 자주 등장한다. 시 '꽃벼슬'에서는 한식날 돌아가신 아버지의 묘를 모자가 찾아간다. 아들은 무덤에 난 쥐구멍에다 꽃다발을 꽂아드린다. "꽃밥 한 그릇 바치는 것이다" .
어머니는 쥐구멍에 술잔을 따르며 "새끼들이 술 갖고 올 줄 알고/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 있구나" 라고 익살맞게 말씀하신다. 아들이 "무덤 안에서 뭔 소리 들려요" 라고 너스레를 떨자 어머니는 농 (弄)으로 "그랴 니 불알 많이 컸다고 그런다" . (모자 사이에 오가는 이 능청능청한 대화여.)
이정록 시인의 시는 이처럼 곰살가운 살내가 수북하니 풍긴다.
그의 시를 읽으면 옷 벗고 대중목욕탕에 함께 들어앉아 있는 기분이 든다.
"사랑은 울컥이란 짐승의 둥우리"라고 말하는 그는 안간힘을 쓰며 사는, 몸살 앓는 사람들의 머리맡으로 가 슬그머니
앉는다. 식은땀을 흘리는 자식의 머리맡에서 차가운 물수건을 들고 꼬박 밤을 새던 어머니처럼.
그는 시와 삶의 거리를 18.44미터라고 말한다. ( 18.44미터는 투수판에서 홈 플레이트까지의 거리이다. )
18.44미터가 곧 "너와 나, 사랑과 이별, 탄생과 죽음의 거리"라고 말한다.
그만큼 그의 시는 삶을 정면으로 팽팽하게 응시한다. 삶에 근거해 삶의 현장에서 그의 시는 발발한다.
"내 꿈 하나는 방방곡곡 문 닫은 방앗간을 헐값에 사들여서 술집을 내는 것 " ('좋은 술집')이라고 말하는 시인.
가난하고 쓸쓸한 사람들에게 공짜 술도 나눠주고 봉지쌀도 나눠주고 싶다는 시인.
그는 소년교도소에 가서 한문을 가르치기도 하는 천안 중앙고등학교 교사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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