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짓말을 타전하다 [안현미] 여상을 졸업하고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아현동 산동네에서 살았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사무원으로 산다는 것 한 달치의 방과 한 달치의 쌀이었다. 그렇게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 살았다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도 슬프지 않았다 가끔 대학생이 된 친구들을 만나면 말을 더듬었지만 등록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던 날들은 이미 과거였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비키니 옷장 속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출몰할 때도 말을 더듬었다 우우, 우, 우 일요일엔 산 아래 아현동 시장에서 혼자 순대 국밥을 먹었다 순대국밥 아주머니는 왜 혼자냐고 한번도 묻지 않았다 여상을 졸업하고 높은 빌딩으로 출근했지만 높은건 내가 아니었다 높은 건 내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꽃다운 청춘을 바쳤다 억울..

쉬 [문인수]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생(生)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 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아이쿠, 시원하시것다아" 농하듯 어리광 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였다고 합니다. 온몸, 온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땅에 붙들어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 문인수 (194..

전라도 가시내 [이용악] 알룩조개에 입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뿐더러 까무스레한 네 얼굴 가시내야 나는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 바람소리도 호개도 인전 무섭지 않다만 어드운 등불 밑 안개처럼 자욱한 시름을 달게 마시련다만 어디서 흉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만 같애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 미더운 북간도 술막 온갖 방자의 말을 품고 왔다 눈포래를 뚫고 왔다 가시내야 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매이자 술을 부어 남실남실 술을 따르어 가난한 이야기에 고이 잠거다오 네 두만강을 건너왔다는 석 달 전이면 단풍이 물들어 천리 천리 또 천리 산마다 불탔을 겐데 그래도 외로워서 슬퍼서 초마폭으로 얼굴을 가렸더냐 두 낮 두 밤을 두루미처럼 울어 울어 불술기 구름 속을 달리는 양 ..

일찌기 나는 [최승자]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 모른다 나는너를 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 최승자 (1952년 ~) 시인 1980년대 대표적인 여성시인의 한 사람인 최승자 시인. 그녀의 시는 송곳의 언어로 위선적인 세계와 정면으로 맞선 하나의 살의 (殺意)였다. 가장 최승자 답다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