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 [정진규] 삽이란 발음이, 소리가 요즈음 들어 겁나게 좋다, 땅을 여는 연장인데 왜 이토록 입술 얌전하게 다물어 소리를 거두어 들이는 것일까 속내가 있다 삽, 거칠지가 않구나 좋구나 아주 잘 드는 소리, 그러면서도 한군데로 모아지는 소리, 한 자정(子正)에 네 속으로 그렇게 지나가는 소리가 난다 이 삽 한 자루로 너를 파고자 했다 내 무덤 하나 짓고자 했다 왜 아직도 여기인가 삽, 젖은 먼지 내 나는 내 곳간, 구석에 기대 서 있는 작달막한 삽 한 자루, 닦기는 내가 늘 빛나게 닦아서 녹슬지 않았다 오달지게 한번 써볼 작정이다 삽, 오늘도 나를 염 (殮) 하며 마른 볏집으로 한나절 너를 문질렀다 * 정진규 ( 1939년 ~ 2019년) 시인 시인은 언어의 맨살을 만진다. 말과의 상면의 말의 '한 줄금..
긍정적인 밥 [함민복] 시 (詩)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덮여 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 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 함민복 ( 1962년 ~) 시인 "아무리 하찮게 산// 사람의 생(生) 과 견주어 보아도// 시(詩)는 삶의 사족 (蛇足)에 불과" ('詩') 하지만 시인은 시를 써서 세상의 돈을 쥔다. 끙끙대고 밤을 세우며 쓴 노력에 비하면 원고료는 박하고, 몇 년 만에 펴내고 받..
혼자 가는 먼 집 [허수경] 당신 . . . . . ,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 . . . . ,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 . . . . ,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한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 . . . . , 그대라는 자연의 달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 . . . . ,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 . . . . ,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 . . . . ,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
푸른 곰팡이 - 散策詩 [이문재]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었습니다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편지는 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 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 가는 편지와 받아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 그대가 가고 난 뒤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 이문재 (1959년 ~) 시인 이문재 시인의 시들은 치열하고 내부가 끓고있다. 그의 시들은 결사 (結社)를 한다. 주로 도시와 문명의 급소를 공격해 단숨에 제압한다. 시 '푸른 곰팡이'가 실려 있는 두 번째 시집 '산책시편' (1993)은 시단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는 이 시집을 통해 우리가..